곽동언의 마음산책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바쁜 농번기에도 아침저녁으로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다. 아궁이에 지핀 불길이 잦아들면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하얀 행주로 가마솥 뚜껑을 들어 올리셨다. 그러면 구름 같은 김이 피어오르고 집안 가득 향긋하고 따뜻한 밥 냄새가 진동했다. 내 유년의 기억에서 이보다 평화롭고 푸근한 풍경이 또 있을까.책을 읽다가 점심시간을 놓쳤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딱히 메뉴를 정하기가 어려울 때 찾아가는 백반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 주인이 재빠르게 물병을 내려놓으며 양해를 구한다. 마침 밥이 떨어져서 새로 밥을 짓고 있으니 10분만 기다려달라는 거였다.

난 괜찮다며 천천히 하시라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내심 기쁜 마음이었다. 식당에서 어쩌다가 갓 지은 밥이 식탁에 올라오면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흐르는 밥을 대접받게 되면 마음에도 훈기가 도는 것 같고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날에는 김치 하나라도 성찬이 된다.


밥이란 단어에는 분명 가슴까지 와 닿는 따듯한 온기가 들어 있고, 솥에서 나는 김처럼 아련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충전이 되는 긍정의 에너지를 안겨준다. 세월이 흘러도 따듯한 밥 한 끼는 그리운 고향,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인에게 밥은 특별하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먹을거리를 뛰어넘어 우리의 삶과 문화의 상징이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가장 인간적인 인사의 표현법이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부모님 세대의 대표적인 인사말은 ‘밥은 먹었냐?’이다. ‘좋은 아침’보다 더 정겹고 친근하며 따듯한 인사말이다. 밥 하나면 모든 인사를 대신할 수도 있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밥 먹고 가라’는 게 인사였고, 동네 어른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가 인사였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때도 ‘밥은 먹고 다니냐?’는 한 마디로 모든 안부를 대신할 수 있었다. 밥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밥심’이라 부른다. 왜 ‘밥힘’이 아니고 ‘밥심’일까? 문법적인 것을 떠나서 밥을 먹는 일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본능을 초월해 감성을 채우고 마음에 온기를 충전하는 소중한 의식에 가깝다. 그러기에 밥의 힘을 ‘밥심’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리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2천 11만 6천 가구) 중 1인 가구 수가 598만 7천 가구로 전체의 29.8%를 차지하며 1위 자리에 올랐다. 기존의 대표적인 가구 형태였던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구(596만 2천 가구)는 2위로 밀려났다. 세상 따라서 가구 형태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식문화도 바꾸어 놓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집밥’은 이제 현대인들의 로망이 되어가고 있다.

외식과 매식買食이 늘고, 식당을 가도 혼자서 밥을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혼밥 문화’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어떤 이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 끼를 때우는 일이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빠르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시류에 휩쓸리면서 우리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아직 이 땅에서 유효하다. 밥심은 음식 자체보다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 밥심의 원천이자 밥이 가진 온기와 힘의 근원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족家族이라 부르기도 하고 식구食口라고도 부른다. 식구의 사전적 의미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동거인 자격이지만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가족과 동격으로 여겨온 것이다. 그만큼 함께 밥을 먹는 일이 의미 있는 행위라는 반증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1인 가구가 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루 두세 번 하는 식사를 거르고 살 수는 없다. 이왕 하는 식사라면 1주일에 한 번쯤은 누군가를 위해 따듯한 밥을 짓고 한솥밥을 먹어보자. 세상살이가 제아무리 고단해도 그런 식구가 곁에 있다면 든든한 밥심으로 새로운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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